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문단 편집) === 아틸라와의 싸움 === [[아틸라]]는 서기 434년에 훈족의 지도자로 등극한 상태였는데 이 시기 아에티우스가 갈리아에서 세력을 키우자 이를 경계하고 있었고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 겐세리크/게이세리크로도 불린다.]로부터 서로마 침공을 부추김 받고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여동생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 공주의 구혼 편지를 받자[* 본인의 결혼 [[지참금]]으로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약속했다고... ~~[[이뭐병]]~~] 이를 빌미로 서기 451년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를 침략했다. 물론 아에티우스도 훈족의 무서움을 알았기에 그를 선물 등으로 달래보기도 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아틸라는 기세좋게 여러 성을 점령한 뒤 아우렐리아눔([[오를레앙]])으로 향했다. 이에 아에티우스는 갈리아계 원로원 의원이었던 [[아비투스(로마)|아비투스]]의 도움으로 서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 1세]]와 연합하고, 아틸라의 휘하에 있는 [[알란]]족의 상기바누스와 접촉하여 그들로 하여금 [[훈족]]과 연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렇게 뒷공작을 통해 입지를 다진 후 서고트족의 군대와 합류한 뒤 아틸라가 포위하고 있는 아우렐리아눔으로 향해 진군하였고 이에 아틸라는 [[연합군]]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포위를 풀고[* 아틸라 역시 당시에 꽤 고전하고 있었는데 아틸라의 공격을 받던 아우렐리아눔의 주민들이 주교 아니아누스(Anianus)의 독려하에 필사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이었다. 아틸라가 진격하면서 갈리아의 도시들을 쑥대밭으로 만든 게 되려 역효과를 불러 일으킨 셈.] 마침내 카탈라우눔 평야에서 아에티우스의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후일 '''[[카탈라우눔 전투]]'''로 불리게 된 이 전투에서, 아에티우스와 서고트군은 아틸라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였고, 아에티우스는 전사한 테오도리크 1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모든 전리품을 독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 해에 아틸라는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그는 아퀼레이아를 폐허로 만드는 등의 파괴와 약탈 행위를 자행하였으며 공포에 빠진 서로마 황제는 라벤나를 떠나 로마로 달아났다.[* 이때 라벤나를 비롯한 북이탈리아가 폐허가 되었고 또 다른 북침을 겁낸 황제는 아예 로마에 눌러앉았다. 즉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 명목상 수도로 전락했던 로마가 아틸라의 침공 이후 황제가 거주하는 진정한 수도로 다시 복귀한 셈이었다. 이 시점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느냐만(...).] 이 지경인데도 아에티우스는 갈리아에서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군대가 아틸라군을 막을 만한 전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 아에티우스의 군대라는게 훈족에게서 데려온 용병을 주력으로 삼아왔는데 아틸라와의 싸움에선 이들을 쓸 수 없었고 따라서 아틸라군을 상대할 만한 전력이 되지 못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갈리아에서 아틸라군을 격파했을 땐 서고트족과 연합하여 간신히 맞먹는 전력을 갖추었으나 이탈리아에서는 단독으로 상대해야 했다.]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그래도 아에티우스는 일부의 병력을 동원, 아틸라의 진군과 보급에 훼방을 놓으며 그의 진군 속도를 늦추었다고 한다. 그 사이 아틸라는 포 강에 이르렀고 이곳에서 로마 수도장관 트리게티우스, 전직 집정관 아비에누스, 그리고 교황 [[레오 1세(교황)|레오 1세]]로 구성된 로마 사절단과 교섭을 한 뒤 물러났다. 서기 453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이 아에티우스의 아들과 결혼했다. 이렇게 아에티우스의 아들이 테오도시우스 황실과 연결되자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에티우스가 자신의 아들을 새로운 황제로 등극시키지 않을까 불안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었던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와 황제의 [[환관]]이었던 헤라클리우스가 황제의 의중을 눈치채고 아에티우스 암살 음모를 꾸미게 되었으며, 다음해였던 서기 454년에 황실 궁전에서 아에티우스가 황제를 알현하던 도중, 황제가 휘두른 칼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로써 아에티우스는 볼모 생활, 전쟁, 권력 투쟁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